1997년 봄을 기억하면서 가슴이 뛰는 이유
렉스바이오 이정규 대표
작년을 기점으로 한국 제약바이오 분야는 30년 역사를 자랑하게 되었다. 한국은 특이하게도 저분자 신약을 본격적으로 하기 전에 유전자재조합 단백질 의약품을 먼저 시작한 나라이다. 물질특허가 1987년도에 도입되고, 국내 제약사들이 위기를 느끼며 신물질 개발에 착수했는데, 생명공학(유전공학) 붐은 1980년대 초반에 불었으니 말이다.
1982년 한국유전공학연구조합이 결성되고 학계와 민간기업들이 주축이 되어 당시 “유전공학”이라고 알려진 단백질재조합 기술을 이용한 유용단백질의 생산에 나섰고, 1983년 12월 31일 제정된 “유전공학육성법”이 요즘 흔히 말하는 바이오의약품 개발을 촉진하는 법적기반을 마련하였으니 한국은 바이오분야에서는 분명 상당히 빠른 움직임을 보였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늘 복받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 이유는 위의 바이오의약품의 국내 도입초기에 미국과 국내에 연구소를 설립하고 현재까지 계속 활발한 연구개발을 하면서 동시에 초기 한국 신약분야의 역사를 일구어 나갔던 기업인 럭키화학(현, LG생명과학)에서 첫 직장생활을 하였고, 가장 가슴뛰는 시기인 1996-2000년까지 주요 과제들에 관여되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주요역할을 하던 많은 분들이 국내 여기저기에서 한국제약바이오의 주축으로 역할을 하고 있기도 하다.
상업적인 이유에서 “실패한 신약개발 사례”로 언급되기도 하지만, FACTIVE(물질명 gemifloxacin, 프로제트 코드명: LB20304a) 가 없었다면 국내 신약연구개발의 역사를 쓰기는 어렵다. 그리고 이 FACTIVE 가 바로 필자가 사업개발을 경험한 첫번째 프로젝트이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가장 자랑스럽고 기억에 남는 일이다.
LB20304a 코드명의 뜻은 이러하다. Lucky Biotech의 20번째 프로젝트의 304째 화합물 중에서 첫번째 염인 메실레이트(mesylate)라는 뜻이다.
LB20304a는 1994년 당시 퀴놀론계항생제 프로젝트 리더인 홍창용 박사와 남두현 박사가 합성팀을 이끌었고, 개발이 진행되어 1996년 10월 임상 1상 결과를 감염증 관련 최대 학회인 ICAAC학회에서 포스터 발표를 하였다.
당시 2002년 특허 만료를 앞두고 있던 블록버스터, 오그멘틴(Augmentin)에 대한 후속제품을 찾고 있던 SmithKline Beecham (현GlaxoSmithKline)이 당시 ICAAC 포스터를 보고 연락이 왔다.
그리고 1997년 1월 4일 대전의 LG화학 기술연구원에서 SmithKline Beecham의 사업개발 및 연구팀과의 첫번째 미팅이 있었다. 당시 SB의 팀은 Ms. Annette Clancy가 대표가 되어 왔고 사업개발 인력, CMC 관련 인력이 와서 미팅을 진행하였다. LG 화학에서는 현재 종근당 부사장인 김규돈 박사가 사업관련 협상을 총괄하고, 연구소에서 개발을 담당하던 김인철 박사(현 항암신약개발단 단장)가 연구개발 관련 사항들에 대한 협의를 이끌었다. 필자는 김규돈 박사를 도와 사업개발팀원으로 협상에 참여하게 되었다.
1990년 한국 최초의 기술이전이었던 3세대 세파계 항생제의 Glaxo 기술이전의 경험이 있기는 했지만, LB20304a의 경우는 전사적인 지원을 받았으며 특별히 외부 전문가인 오석우 변호사(Jeffrey SW Oh)가 협상 전문가로 함께 참여하였다.
1월 4일 미팅에서는 SmithKline의 역량제시 발표(capability presentation) 로 시작하여 향후 시장 전망 및 매출 추정을 고려한 재무적 조건 의 제시 및 개발 일정을 제시하였다. LG화학은 개발의 주요사항들을 주로 기술적인 측면에서 발표하였다.
당시 가장 이슈가 되었던 것은 LB20304a가 두가지 이성질체의 혼합물인 라세메이트(racemate)였는데 과연 두가지 이성질체가 동일한 약효를 보이는지 혹시나 어느 한 이성질체가 약효가 없거나 대사체가 다르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당시까지 이런 것이 이슈가 될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LG 화학으로서는 재빨리 추가 실험을 해서 확인하는 수 밖에 없었다. 당시 PK팀을 이끌었던 이용희 박사와 약리팀을 담당했던 곽진환 박사(현 한동대) 그리고 실험을 담당했던 김무용 박사(현LG 생명과학)의 깔끔한 실험결과 제시로 라세메이트 이슈는 완전히 사라졌다.
1월 4일 미팅 이후, CMC 관련 현장 실사, 재무조건에 대한 협상, 그리고 계약서 문구 작업 등이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어 5월 9일 양쪽에서 날인을 하였으니 첫 미팅부터 계약 날인까지 4개월이라는 엄청난 속도로 진행된 사례였다.
그 과정에서 오석우 변호사의 역할은 매우 컸다. 호칭이 변호사이지만 실질적인 역할은 investment banking역할을 하여서 재무조건에 대한 분석, 계약서의 주요사항 분석 및 협상까지를 담당하였다. 당시 사업개발팀이 있기는 했지만 이러한 협상이 처음인 관계로 협상관련하여서는 실질적으로 오석우 변호사가 매우 큰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오석우 변호사는 이후에도 LG, 유한양행 등의 신약후보물질들을 다국적 제약회사에 라이센싱하는데 관여되었으니, 비연구자로서 한국 신약산업의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고 할 수 있다.
4월 말에 마지막 미팅이 이었는데 필자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게 되었다. 경상기술료까지 결정된 후 마지막 협상은 원료의약품 (흔히 API라고 하지만 FDA자료에는 Drug substance라는 용어가 쓰인다)의 상업생산시의 공급가격 문제였다. 계약상 LG화학이 원료의약품을 SmithKline Beecham에게 공급하기로 되어 있기 때문에 LG화학으로서도 향후 매출과 이익에 직접 관련되는 것이었고, SB입장에는 가격이 높지 않은 항생제의 특성 상 공급가격의 제한이 있는 상황이었기에 상당히 중요한 협상이었다.
그런데 이 협상을 위해 온 사람은 한명… 당시 SmithKline Beecham의 사업개발을 총괄하던 Ms. Tamar Hawson 혼자이었다 (Tamar라는 이름은 성경에 “다말”이라고 표현된 이름이라 필자는금방 유태인이란 것을 알아차렸다). 당시의 직함은 Senior Executive Vice President.
협상 테이블의 반대편에는 LG담당자가 5명이 앉아 있었고 사업관련 협상이라 김규돈 박사가 주도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중요성 때문에 옆방에는 hotline으로 당시 의약품 및 생활용품사업을 총괄하던 조명재 사장이 서울 본사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Ms. Hawson은 가방에서 연필과 지우개, 그리고 노란색 노트패드를 꺼냈다. 그리고 협상이 시작되었다.
이 장면을 오래 기억하게 된 것은 협상의 내용 보다는 당시 협상 테이블의 건너편에 앉아 있던 Ms. Hawson 때문이다. 협상의 최고 책임자가 다른 참모도 없이 그리고 첨단 notebook같은 것도 없이 연필과 지우개, 그리고 노란 노트패드만 꺼내 놓은 상황 때문이었다. 너무나 프로페셔널하고 효율적인 모습이었고 자신감의 표출이었다. 계속 사업개발 업무를 하면서 해외 업체들을 많이 만나 보면서 알게 된 것이지만 최고 임원진들이 고객 혹은 협상파트너와 적극적이고 직접적으로 만나는 등 “전진배치”되어 활동하는 것은 영미권 제약회사들의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대부분 과장, 부장급이 전진배치되고, 임원진들은 추후 보고 받으며 지휘하던 한국적 관행만 알고 있었던 필자에게는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었다.
그후 크리스탈지노믹스에서 사업개발을 하면서 몇번 더 Ms. Tamar Hawson을 보았다. SmithKline Beecham이 Glaxo 에 합병된 후에는 BMS 최고사업개발담당자로 옮겼다가 몇 년 후에 은퇴하여 현재는 투자기관의 자문으로 있다. 본인은 몰랐으리라. 필자에게 전문직으로서의 역할모델이었다는 것을.
가격협상도 상호 이익을 잘 반영하는 방식으로 잘 끝나서 5월 9일 날인을 하게 되었고 5월 16일(영국시간 5월 15일)에 첫 계약금이 입금되어 계약이 완전히 마무리되었다.
그날 저녁 필자는 다음날 있을 본인의 결혼식을 위해 부산으로 급히 가야했다.
필자에게는 Factive의 계약이 잊혀지지 않는 것은 계약서 상의 날인일인 5월 9일이 생일이요, 계약금액이 입금된 다음날이 5월 17일이 결혼기념일인지라 더욱 더 그러하게 되었다.
첫 계약이었던 Factive 계약을 통해서 업무적 성과는 둘째로 하고 좋은 역할 모델이된 Ms. Tamar Hawson을 알게 되었고, 계약과 협상에서 많은 것을 가르쳐준 오석우 변호사를 만나게 되었다. 또 현재 대표적인 바이오전문투자기관인 MPM Capital의 managing director로 있는 Dr. Gary Patou와도 알게 되어 지금까지 교류하고 있다.
그래서 봄이되면 당시의 기억들을 되새기며 팽팽한 긴장감과 보람 그리고 흥분들이 느껴지면서 당시 함께 수고하고 고생했던 많은 분들이 생각이 난다.
아마 이런 느낌은 연구원들의 꿈과 희망의 결정체를 들고 기술이전을 시도하는 모든 이들에게 지금도 느껴지리라 생각한다. 필자도 작은 소망이라면 그때 그 흥분과 서렘을 느끼면서 앞으로 국내 연구진들의 좋은 연구결과를 가지고 좋은 파트너와의 협상 자리에 앉는 것이다. 국내 신약연구개발 관련 역량이 점점 높아지고 있는 현실을 보며 이런 소망을 이룰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