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운 혹은 준비된 우연인가?
(주)한독 고문 배진건
2003년 헨리 체스브로(Henry Chesbrough) 교수에 의해 주창된 개방형 혁신(Open Innovation)은 혁신 활동에 대한 패러다임 변화를 주도하고 있다. 개방형 혁신은 혁신적 아이디어가 여러 조직이나 개인들에 분산되어 있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지식이 증가되는 속도가 가속화되고 지식근로자의 이동성이 증대됨에 따라 하나의 기업이 혁신적 아이디어를 독점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혁신적 아이디어가 분산돼 있기 때문에 기업 내부의 아이디어, 지식, 기술뿐만 아니라 기업 외부의 이런 모든 것들을 적극적으로 획득하여 혁신에 활용하자는 주장이다. 신약개발에서도 개방형 혁신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신약개발의 특성상 오랜 연구 기간과 치솟는 연구개발 비용 그리고 늘어나는 실패 확률 때문에 바야흐로 개방형 혁신의 시대가 열렸다고들 한다. 아무리 큰 빅 파마(Big Pharma)라도 기업 내부적으로 충당하는 데에는 한계가 찾아왔다. 이에 따라 기존 폐쇄형 혁신(Closed Innovation) 모델은 종말을 고했다. 상대적으로 영세한 우리나라 제약사도 이미 다국적 제약사들을 쫓아 오픈 이노베이션으로 방향을 틀었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한미 FTA 공식발효 (2012년3월)로 해외 오리지날 신약 제약기업의 특허권 강화로 국내 제네릭 시장에 큰 지장을 초래하고, 혁신신약 개발 없이는 시장경쟁이 불가능할 것으로 전망되는 상황이다. 국내의 신약개발 연구경쟁력과 제약산업의 국제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대한민국 정부는 ‘2020 Pharma Korea’ 라는 목표를 정하였다. 이어서 정부 주도의 산-학-연-관의 연계에 의한 이코시스템(Eco System)을 만들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오픈 이노베이션으로 신약개발 방향을 온전히 틀지 않으면 대한민국의 국제적인 경쟁력의 신약개발은 계속 꿈으로만 남아 있을 것이다.
국내 제약사들은 오픈 이노베이션(Open Innovation)을 connect and development (C&D)로 많이 부른다. C&D를 어떻게 잘 할 것인가? 어떻게 올바르게 할 것인가? 대학, 연구소, 벤처와의 C&D를 통한 과제의 연결은 과연 행운인가 아니면 준비된 우연인가? 현실적으로 시험 문제처럼 답이 정확하게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한독에서 현재 진행하는 과제의 예를 들어 어떻게 다른 기관과 연구하는 결과가 나오는가를 짚어보려고 한다. ㈜한독은 오랜 다국적사와의 합작 관계에 있었기에 신약개발에 대한 필요성을 그리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사노피가 합작의 주인이 된 2007년부터는 상황이 달라졌다. 한독약품도 자생하려면 신약개발이 필수가 되어버렸다. ㈜한독은 국내 제약사 가운데 상대적으로 늦게 출발하였기 때문에 오픈 이노베이션에 힘을 쏟을 수 밖에 없었다.
C&D가 과연 행운인가 아니면 준비된 우연인가?를 답하기 위하여는 ‘serendipity’에 대하여 생각해야 한다. 신약개발의 역사에서 ‘serendipity’에 의하여 탄생한 약은 플레밍의 페니실린부터 바이그라까지 의외로 많이 알려져 있다. serendipity는 영국의 18세기 문필가였던 Horace Walpole이 만든 단어이다. '행운(幸運)'의 다른 말로 알려져 있지만 단지 행운은 아니다. 우연히 예기치 않게, 운수 좋게 새로운 것을 발견해내는 능력을 가리킬 때 쓰인다. 월폴은 1754년 1월 28일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Serendip(스리랑카의 옛이름)의 세 왕자]라는 동화에 나오는 왕자들이 '그들이 미처 몰랐던 것들을 항상 우연이면서도 지혜롭게 발견'하는 모습에서 이 단어를 만들었다고 한다.
우리가 미처 찾을 생각도 못하고 있을 때 귀중한 것을 발견하는 우연한 기회가 세렌디피티라면, 이 기회를 얻은 운 좋은 발견자는 최소한 자신이 발견한 것의 창조적인 가능성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세런디피티는 생각의 폭이 좁은 사람, 즉 하나의 목표 외에 다른 것은 배제하고 마음을 하나에만 집중하는 사람에게는 잘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은 전혀 상관이 없고 소용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까지도 관심의 영역을 넓히고 그 속에서 중요한 무언가를 눈여겨볼 자세가 되어 있다면 우연한 발견의 행운, 세렌디피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대표적인 신약들의 개발 과정을 굳이 찾아 보지 않더라도 우연이라는 모습으로 찾아오는 ‘세렌디피티’는 과학자들뿐만 아니라 프로젝트를 책임지는 기업인에게도 혐오의 대상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활용해야 할 소중한 자원이라고 여겨진다. 신약을 개발하는 제약회사를 포함, 21세기를 헤쳐 나가는 기업에 있어서 ‘세렌디피티’는 꼭 필요한 경영자원이다.
Stef Lewandowski는 “Accelerating serendipity”라는 글에서 어떻게 하면 “Can you make happy accidents happen more often?” 하고 물어본다. 1. Just turn up 2. Put yourself in the right place 3. Avoid zemblanity 4. Say “Yes, and….” Instead of “Yes, but…” 5. Keep your eyes open for opportunity 6. Use serendipity engines 7. Don’t be too precious with your ideas 8. Help other people to have serendipity 9. Get good at introductions 10. Answer “But why?” with “I don’t know yet” 라는 열 가지를 나열했다. 그 중에서도 제일 처음 두 가지의 “Just turn up”과 “Put yourself in the right place”가 마음에 와 닫는다. 우리는 어떤 모임에 초대 받으면, 내가 요사이 너무 바쁜데…… 거기까지 가려면 시간이 너무 걸리는 것이 아닌가? 거기 가서 무엇을 얻을게 있을까? 그곳에 안 갈 온갖 이유를 만들어내고 싶은 것이 우리의 속성이다.
나는 ㈜한독에서 2011년 11월 3일 첫 출근을 시작하며 어떤 모임이든지 가야 할 이유를 만들기로 작정을 하였다. 연세대와 화학연구원이 공동으로 진행하는 Innovative 과제를 심사해 달라는 요청을 받자 그 자리에서 수락하였다. 11월 8일 팔래스호텔에서 과제 발표회가 있었다. Wnt pathway를 targeting 하는 5과제의 심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연세대의 최강열 교수를 그 자리에서 처음 만났다. 골다공증 치료제 개발을 위한 정말 흥미 있는 First-in-class 과제이었다. 무엇보다 사이언스가 단단하고 아직 안 가본 길을 주도하고 있었다. KO 마우스 모델까지 만들어서 그 타겟을 block 하면 뼈가 튼튼하게 잘 자라는 것도 보여 주었다. 문제는 대부분 과제가 Wnt pathway 특성 때문에 protein-protein interaction을 차단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진행하고 있었다. 내가 던진 질문들이 괜찮았던지 평가가 끝나고 최 교수가 이상한 이야기를 하였다. 이 과제보다 더 흥미로운 항암제 과제가 있으니 보여 드리고 싶다는 제안이었다.
2011년 12월 13일 오후 3시 최강열 교수와 다시 만났다. 그 분이 보여주는 데이터를 보자마자 내 눈이 뚱그래졌다. 와우~ 이런 과제를 만나다니. 이것은 틀림없이 성공할 수 밖에 없는 과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Wnt pathway와 Ras pathway를 지난 20년간 일한 사람이 바로 나였기 때문이다. “Just turn up”을 하겠다고 마음에 결정하고 실천하니 “Put yourself in the right place” 라는 두 번째 조건으로 바로 연결되었다. 마치 운명과의 만남처럼. 행운인지 준비된 우연인지 가리기 힘들었다. 그날은 바로 내 생일이었다. 그것도 나의 환갑 생일이었다. 잔치는 물론 안 하였지만 큰 선물을 받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문제는 오픈 이노베이션으로 모두 해결하겠다는 ‘나’를 어떻게 최 교수가 신뢰를 가지고 믿고 따라 올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국내에도 ㈜한독보다 더 크고 나은 제약사가 있기 때문이었다. 2012년 4월에 국제 논문이 발표되자 다른 회사들이 최 교수에게 접근하기 시작하였다. L, C, G, J의 4 회사가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자 그때는 아직 한독과 계약도 체결하지 않았기에 최 교수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당연하였다. 2012년 8월 20일 나는 최 교수 사업단에 가서 발표를 하였다. 그 자리에서 ㈜한독이 medicinal chemistry를 다른 회사에 뒤지지 않고 in house 직접 할 수 있게 준비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이것도 “Just turn up”이었다. 돌아오는 길이 여름 밤 비가 쏟아지는 밤길이었다. 꼬불꼬불 거의 2시간 남한강을 따라 서울로 오는 길이었다.
나는 회사의 최고경영진을 설득하기 시작하였다. 모든 것을 오픈 이노베이션으로 해결할 수는 없으며, 최소한 brain이 과제를 진두 지휘하는 시스템이 되어야 한다고. 이것의 결과로 2012년 12월 10일 현재 제일 잘 나가는 머크의 당뇨병 약인 자누비아를 직접 합성하시고 개발에 참여하셨던 김두섭 박사님이 ㈜한독에 첫 출근하게 되었다. 그리고 2012년 12월 26일 연세대와 한독이 계약서에 사인하는 협약식을 거행하였다. 그 자리에 나는 없었다. 크리스마스 휴가로 뉴욕에 있는 아이들을 보러 갔기 때문이다. “Just turn up”이지만 이런 좋은 자리에는 “No Show”도 괜찮았다. 멀리서도 마음이 뿌듯하였기에.
세계적인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는 “21세기에는 ‘생각지도 못한 손님’이 ‘생각지도 못했던 목적’을 위하여 찾아온다”고 하였다. 또한 “이 ‘보이지 않는 손님’을 우연하게라도 발견한 자만이 살아남을 것”이라고 한 말은 다시 한번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미래를 지향하는 기업들이 그렇게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창의성 또는 창조성은 필연이 아닌 우연의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세 잎 클로버의 꽃말이 ‘노력 속의 행복’이라고 한다. 반면 네 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운’이라고 한다. 네 잎 클로버 ‘행운’을 찾기 위하여 세 잎 클로버 ‘행복’을 짓밟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본다. 주어진 환경 속에서 늘 노력하고 그 분야에서 최고가 되기 위하여 준비하는 자에게만 ‘세렌디피티’는 성탄절 밤에 내리는 눈처럼 소리 없이 조용히 다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